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페준타 제국 (문단 편집) === 쇠퇴하는 제국 === 알렉시오스 2세가 33년의 긴 통치를 마감하자, [[이베리아]]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안드로니코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안드로니코스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30~1332)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 2세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그는 제위에 오르자 마자 자신의 동생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그 동생들 대부분은 살해당했으나, 바실리오스는 삼촌 미하일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도주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32년 갑자기 죽었고, 뒤를 이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사생아인 [[마누일 2세(트라페준타 제국)|마누일 2세]] 메가스 콤니노스(1332)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8살 된 유아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곧 퇴위당했고 트라페준타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망가 있던 [[바실리오스(트라페준타 제국)|바실리오스]] 메가스 콤니노스(1332~1340)를 제위에 앉혔다. 바실리오스는 처음에 마누일을 살려두려 했는데, 대신 요안니스가 마누일 2세의 복위를 획책한 반란을 꾸미자 이 반란을 간단히 진압하여 자신의 제위를 공고히 했고 자신의 지위에 골칫거리가 된다는 것이 증명된 마누일 2세를 살해하였다. 바실리오스는 자신을 옹립한 트라페준타 귀족들에 대해 보상을 하였는데, 이 보상으로 귀족들은 모두 영지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 영지에서 권력을 남용해버렸고 신민들은 이런 보상을 한 그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또한 친위대이자 수도 방위대인 스콜라리 역시 외국인 용병에게 의지하려 드는 그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바실리오스는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사생아,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해서 입지를 개선하려 했으나 그는 아내에게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리니라는 다른 정부를 만들어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는 이런 남편의 행태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1340년 그를 독살하고 제위를 찬탈함으로써 앙갚음을 하였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는 바로 자신을 여제로 칭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 역시 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데려온 용병 등은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스콜라리 세력이나 트라페준타의 호족 연합은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에 반대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단결력이 매우 형편 없었기 때문에 곧 이리니의 조직적인 진압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투르크 족이 침공해 왔는데, 첫 번째 공격은 어찌어찌 격퇴할 수 있었지만, 2번째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투르크 측에 전염병이 퍼지며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2차에 걸친 투르크의 침공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이리니의 세력에 전에 살아남았던 반란군 세력이 다시 결집하여 도전을 해왔다. 호족 연합은 이미 [[수녀]]가 되어 있던 [[안나(트라페준타 제국)|안나]]를 옹립해 트라페준타로 진격했고, 스콜라리 세력은 지난날 바실리오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도피해 있던 미하일을 옹립했다. 안나는 이리니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고, 뒤이어 미하일도 트라페준타에 도착했다. 안나는 여자라서 [[미하일(트라페준타 제국)|미하일]]이 제위를 점하는 듯했다. 그러나 호족 연합은 자신들이 정권을 쥐고 싶었기 때문에 억지로 안나를 단독 군주로 세우고 미하일은 자신들의 포로로 잡아 쫓아냈다.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는 트라페준타의 중요한 성채 도시였던 [[오이나이온]]에서 자신에게 때가 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 동안 수도에서 배제되어 있던 스콜라리 세력은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의 아들, [[요안니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요안니스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42~1344)를 옹립하여 트라페준타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 3세는 곧 무능한 통치자임이 입증되었다. 호족 연합 세력은 거의 박멸되었고, 잔존 세력만이 남아 간간이 저항을 이끌고 있었는데 요안니스 3세는 대관식을 마치자 말자 곧 사치에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호족 세력에 의해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의 안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스콜라리 세력은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해 요안니스 3세의 아버지인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를 호족 연합의 손에서 구한 뒤 요안니스 3세를 폐하고 미하일을 즉위시켰다. 이리하여 즉위한 [[미하일(트라페준타 제국)|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는 권모술수에 뛰어난 남자였다. 우선, 미하일은 그를 즉위시키긴 했으나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될 스콜라리에게 덫을 놓았다. 바로 그들에게 지나친 보상을 해주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주기 전략으로 그러자 트라페준타령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미하일은 이 불만 세력과 스콜라리의 대립에 편승하여 스콜라리 세력을 타도하고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에 폐위된 자신의 아들 [[요안니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요안니스 3세]]를 인질로 보내 호족 연합이 재기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일을 미리 막았다. 동로마 제국은 요안니스 3세를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는 그가 트라페준타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아드리아노플]]에 가둬버렸다. 1346년엔 투르크가 트라페준티를 공격해왔으나 마침 [[흑사병]]이 돌아 투르크 군의 세력이 약해지고 1348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도시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제노바인들은 트라페준타 령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케라수스]]를 점거했다. 1340년대 초반의 내전 당시 제노바인들이 대량 살육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내전으로 피폐해져 있던 트라페준타 함대는 당시 세력의 절정을 달리던 제노바 함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케라수스]]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중요한 성채 레온토카스트론을 넘겨주어야 했고, 베네치아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미하일은 지난날 자신이 탄압했던 스콜라리의 대장, 니키타스 스콜라리스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니키타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바실레이오스의 아들, [[알렉시오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알렉시오스 3세]]를 데리고 와 제위에 앉혔다. 알렉시오스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49~1390)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바실리오스를 암살한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그곳 궁정에서 자라난 터였다. 11세가 되었을 때, 그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에 의해 트라페준타로 보내져 황제로 옹립되었다. 전 황제 미하일 메가스 콤니노스는 [[수도자]]가 됨으로써 그의 제위가 공고해졌다. 처음부터 알렉시오스를 지지하며 계속 후원했던 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는 1351년에 자신의 친척을 알렉시오스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런 관계를 강화했다. 국내적으로는 호족들간의 대립으로 입지가 별로 좋진 않았지만, [[아크 코윤루]]와의 동맹으로 대외 입지는 탄탄해졌다. 내전기에 크리미아 내륙부는 거의 반독립적 상태가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테오도로 공국]]을 자칭하고 아르메니아 출신 귀족을 공작으로 옹립하여 트라페준타와의 우호를 다짐했다. [[테오도로 공국]]의 자발적 종속과 함께 알렉시오스 3세의 국내의 입지가 점점 강해지자, 니키타스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케라수스]]에서 1354년에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니케타스가 포로로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1340년부터 15년동안 지속된 긴 내전은 끝났다. 그리고 곧 [[알렉시오스 3세(트라페준타 제국)|알렉시오스 3세]]는 국경 강화에 착수했으나 1360년에는 호족들이 또 반란을 꾀했다. 이 반란 음모를 분쇄하는 와중에 그는 대토지 소유 호족들을 탄압하여 황권을 강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지난날 내전에 개입하여 이득을 챙기고, 흑해에서 점점 베네치아를 배제해가고 있는 제노바를 견제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다시 통상 조약을 맺고 지난날과 같은 특권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두 도시국가의 영향력을 분쇄하려는 공작을 펴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불만을 품고 내부의 반란 분자를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하였다. 베네치아와의 관계는 곧 수습됐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베네치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알게 되어 그들의 상품 수입량을 지속적으로 줄였다. 이후 내전으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고 수도원 건축과 지원에 힘을 기울이다 1390년 평화롭게 사망했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인물이 [[마누일 3세(트라페준타 제국)|마누일 3세]] 메가스 콤니노스(1390~1417)이다. 1391년부터 1396년까지 그는 베네치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다. 제노바는 자꾸만 베네치아에 의존하려 드는 트라페준타의 정책에 여기에 앙심을 품게 된다. 이 기간 중에 그때까지 트라페준타의 직할령으로 크리미아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던 [[케르손]] 항이 [[킵차크 한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로써 트리페준타의 외교적, 상업적 역량이 타격을 입게 되었다. 1402년,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를 침공해왔다. 그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하면서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고, 마누일은 이것을 수락했다. 이어서 벌어진 [[앙카라 전투]]는 티무르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그동안 [[유럽]]과 소아시아에 걸쳐 세력을 구축하고 로마 제국과 트라페준타를 위협해오던 오스만 투르크는 이것으로 거의 공중분해 됐다. 그러나 그 동안 제위에 눈독을 들여오던 아들 알렉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 마누일은 그에게 전제군주의 호칭을 주면서 달래고자 하였으나, 알렉시오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제위를 노리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된 알렉시오스의 끈질긴 시도는 1417년 마누일이 평화롭게 사망한 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4세(트라페준타 제국)|알렉시오스 4세]] 메가스 콤니노스(1417~1429)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제노바와 대립했다. 결국 제노바는 더 참지 못하고 트라페준타의 함대를 괴멸시키고 말았다. 1418년, 제노바는 황제에게 정전 협정과 보상금 지불을 골자로 하는 조약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1422년까진 다시 평화기였으나, 1425년부터 다시 제노바와 분쟁을 일으켰다. 1428년에 마침내 두 나라는 화해하고 우호 증진에 힘쓰기 시작했다. [[티무르]]가 떠난 후, 소아시아의 투르크족은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두 왕조가 싸움을 시작했는데, [[카라 코윤루]]([[흑양 왕조]])가 [[아크 코윤루]]([[백양 왕조]])를 [[아르싱가 전투]]에서 대파했다. 알렉시오스는 이 두 왕조의 존재가 두려웠다. [[카라 코윤루]]와 [[아크 코윤루]]에 모두 딸을 시집보내 두 왕조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또, 딸을 동로마 황실에도 시집을 보내 그들과의 관계도 강화했다. 그가 보낸 딸이 당대의 유럽 최고 미인으로 유명했던 [[트라페준타의 마리아]]로, 그녀는 당대 유럽 최고 [[미남]]으로 손꼽히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내가 되고 로마의 마지막 황후로 역사에 남게 된다.[* 물론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이지만 그는 제위에 오르기 전 두 번 결혼 했으나 두 아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제위에 있을 동안 독신으로 남았기에 황후가 없었다.] 알렉시오스는 대외적으로는 다른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대내적으로는 아들과의 불화, 의심 많은 성격 등으로 고난이 많았다. 알렉시오스의 아들 요안니스는, 그를 죽이려 하다가 시도가 실패하자 조지아로 도망가 있던 터였다. 그는 조지아에서 다시 카파로 도망가 그곳에서 병력을 모았다. 제노바인들은 그를 지지했으며, 그렇게 모은 군대로 트라페준타를 공격해왔다. [[알렉시오스 4세]]는 저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요안니스가 이기기를 바라는 어떤 귀족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